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 포트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훗날 폴 포트로 알려지는 사()[* '하얀, 창백한'이라는 뜻으로 '상대적으로 밝은 피부 안색'을 나타낸다고 한다.]는 1925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어촌 마을인 쁘렉스버우(, Prek Sbauv)[* 현 캄퐁톰 성.]에서 아들 7명과 딸 2명 중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폴 포트의 출생일이 1928년 3월 19일이라고 서술된 자료들도 있는데, 이는 당시 캄보디아인들이 학교 입학 연령에 맞춰 자녀의 출생 신고를 늦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살롯()이라는 성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어린 시절에는 성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살롯 뻰으로 알려졌는데 이 이름은 훗날 프랑스가 식민정책으로 모든 크메르인들에게 성을 붙이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어머니의 개명 후 이름은 넴 속이다. 폴 포트의 가족은 조상중에 중국계 혈통이 섞였지만 폴 포트의 대에 이르러서는 크메르인들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시 * 폴 포트의 아버지는 12헥타르의 땅과 버팔로 6마리를 소유했고, 약 20명으로 논을 경작했으며, 그의 농지의 연평균 수확량은 20명 이상의 가족을 기를 수 있는 6t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살롯 사의 집안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부농]]이었다. 형 중 한 명은 왕궁의 관방실 서기관이었으며 여기에 사촌누나 메악이 시소와트 모니봉( ) 왕자[*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하던 프랑스가 명목상으로 내세운 국왕으로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이었던 [[영친왕]]과 유사하다. 참고로 이 모니봉 왕의 외손자이자 부계로 육촌 재종조손, 훗날 후임자가 다름아닌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다.]의 첩으로 들어갔다. 모니봉이 1927년 왕위에 오르자 메악은 사실상 왕비가 되었고 1930년에는 이복누나 로응이 모니봉의 다른 후궁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살롯 사의 가문은 잘 사는 집안을 떠나 왕족와 연결된 지배 계층 집안이었고 이 덕분에 살롯 사는 상당히 유복한 어린 시절[* 이 시절에는 후궁인 이복누나와 자주 만났는데, 어린 소년이라 금남구역인 후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첫 경험도 16살 시절에 다른 후궁들과 한 것이었다고 한다.]을 보냈다. 훗날 이 인간이 한 행보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배경이다. 어찌되었든 아버지 살롯 뻰은 살롯 사에게 서양식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고 맏형 수옹과 같이 프놈펜으로 보낸 뒤 캄보디아 전통대로 여섯 살 때 왕실 불교사찰인 왓보뚬()에 들어가 [[동자승|사미(沙彌)]]로 교육받은 뒤 1935년 9월 [[가톨릭]]계 학교인 미셰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은 형편없어서 원래 6년 과정인 미셰학교를 유급해 43년에야 졸업했다. 살롯 사는 당시 캄보디아의 유일한 중등 교육기관인 시소와트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낙방하였고, 운 좋게도 막 신설된 깜뽕짬 근처의 프레아 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에도 성적은 제법 나아졌지만 바이올린과 축구, 농구를 좀 잘한다는 것 말고는 크게 특출나지 않았다. 당시 살롯 사는 예의 바르고 유머 감각이 있고 잘 웃는 데다가 '병아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하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고 한다. 그렇게 1947년 살롯 사는 중학교 생활을 마친 뒤 예전에 떨어졌던 시소왓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살롯 사의 중학교 시절 성적은 중간 정도였는데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 [*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 가운데 론 논이 있었는데 훗날 폴 포트 때문에 축출당하는 캄보디아 대통령 [[론 놀]]의 친형이다.] 어찌되었든 살롯 사는 운 좋게 입학은 했지만 48년 진학시험에는 떨어졌고 공업학교인 프놈펜 기술학교에 목공반으로 편입했다. 근데 이때도 재수가 터졌는지 당시 이 프놈펜 기술 학교에서는 성적 우수자 3명을 프랑스 대학에 국비 유학생으로 보내 주었는데 살롯 사가 편입한 그 해에 5명으로 유학 대상이 늘었고 살롯 사는 과거 학교에서 쌓아둔 지식 등을 통해 49년 여름에 국비 장학생에 선정돼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1949년 10월 사는 프랑스 파리의 프랑스무선공학학교(École Française de Radioélectricité)[* 지금의 EFREI]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때 먼 친적이자 친분이 있던 시소와트 소모노퐁( )이 먼저 입학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살롯 사의 매형이자 선대 왕인 모니봉 왕의 조카로의 후궁인 누나 덕에 친분이 있었다. 소모노퐁의 도움으로 폴 포트는 파리의 부촌인 아미요 가에서 지방장관의 아들들과 같이 하숙했다. 이후 소모노퐁의 권유로 크메르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고 이과정에서 [[이엥 사리]], 손 산, [[키우 삼판]] 같은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 11월 켕반삭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다. 그리고 51년 중순쯤 공산당 세포조직인 마르크스클럽을 거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파리 시절 친구들 가운데 폴 포트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훗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처형되는 서구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의 차이는 필명에서부터 나타났는데, 다른 동료들이 자유 크메르나 크메르 노동자 같은 이름을 선호한 데 반해 폴 포트는 순수 캄보디아 같은 필명을 고집했다. 살롯 사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살롯 사는 형제인 살롯 차이( , Saloth Chhay)를 따라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폴 포트로 알려지게 된다. 30대 초반에 폴 포트는 사립 학교에서 역사, 지리, 프랑스어 문학,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했는데 교사로서의 폴 포트는 훌륭한 교사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었던 키에우 뽄나리( , Khieu Ponnary, 19202003)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